퇴근 후 아무것도 못 하는 나, 의지 부족이 아닐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멀쩡히 일 잘하고 대응 잘 하지만 퇴근 후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회의도 잘 하고 필요한 메일에 답장도 하며 하루를 잘 보냈는데,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날이 있죠. 그런 날은 먹고 싶었던 음식도 먹고 건강하게 운동도 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휴대폰을 보거나 넷플릭스에서 볼 것을 찾아 헤매다 잠 잘 시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하루를 되돌아보면 ‘분명 회사에서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집에 와서는 왜 아무것도 못하지?’ 라는 생각이 들죠. 근데 회사에서 잘 기능했다는 사실이 내 에너지가 충분했다는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마감 기한과 업무 평가, 타인의 요청 앞에서 긴장을 유지하며 남은 힘을 전부 끌어다 쓰고, 안전한 공간에 도착한 뒤에야 미뤄둔 피로가 드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퇴근 후에 느껴지는 무기력함을 바꾸려면 저녁을 더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거창한 계획보다 하루 동안 에너지가 어디에서 소모됐고, 왜 집에 와서야 방전되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사에서 멀쩡했던 것은 괜찮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회사라는 공적인 공간에서는 일정, 책임, 주변의 시선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회의 시간이 되면 정신 차리고 회의에 참석하고, 힘들어도 표정을 관리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집중합니다. 이런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의무를 이행하게는 만들어 주지만 몸과 마음의 피로가 쌓이게 만듭니다.

퇴근 이후엔, 업무를 진행하느라 필요했던 집중력과 주위의 압박이 사라집니다. 그제서야 집중하느라 미뤄둔 졸림, 허기, 짜증, 멍함이 한꺼번에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집에서는 게으르고 회사에서만 성실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현실은 회사에서 이미 에너지를 다 사용해서 집에 와서는 쓸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어떤 상황에서 내 에너지가 소진되는지를 확인하지 못하면 무기력감이 지속되고 번아웃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번아웃이 오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에서처럼 무기력의 크기만 보지 말고, 그 앞에 어떤 상황들이 있었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퇴근 후 방전은 하루 종일 쌓인 보이지 않는 일과 관련됩니다

퇴근 후에도 생산적으로 살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진 않나요?

우리가 일을 할 때, 겉으로 보이는 엑셀이나 ppt, 보고서 같은 결과물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는 없는지 점검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파악하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고, 갑작스러운 요청에 웃으며 대응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 내면의 에너지를 쓰거든요. 특히 언제 일이 추가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실제 업무량보다 긴장 상태가 더 오래 이어질 수 있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업무와 의사결정 과정에 치인 날에는 저녁 메뉴 정하기와 같은 간단한 선택도 버겁습니다. 너무 많은 말을 했어야만 했던 날에는 가족들과의 간단한 소통조차 지나친 요구처럼 들릴 수도 있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업무를 머릿속으로 돌리느라 몸까지 쉬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심리적, 신체적 과부하 상황을 단순한 의지 부족으로 해석하면 절대 안됩니다.

누워서 화면만 보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퇴근 후 침대나 소파에 누워 숏츠만 넘기는 자신을 보면 한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에서는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고, 즉시 자극을 주며, 언제든 멈출 수 있는 활동이 가장 접근하기 쉽습니다. 숏폼을 고른 것은 나에게 가장 쉬운 휴식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그렇게 휴대폰으로 스크롤 하는 행동이 정말 휴식이 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는지는 사실 확인해 봐야 합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습관처럼 넘기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더 피곤한 채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기분 전환은 되었어도 충분히 회복되지는 않았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휴대폰을 무조건 금지하기보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기, 긴 영상 딱 하나만 보기, 숏폼 보기 전에 운동이나 스트레칭 하고 보기 등과 같이 다른 행동과 묶거나 규칙을 정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건강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도저히 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요.

퇴근 후 누워서 휴대폰을 하는 것은 그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오늘부터 해볼 수 있는 저녁 회복 3단계

1단계. 퇴근 후 귀가해서 10분은 그냥 보냅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운동이나 집안일을 시작하는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만히 쉬어보기, 조용히 앉아 물 한잔 마시며 멍때리기, 씻기 등 가벼운 일들을 해 보세요. ‘지금부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이전의 치열했던 일상과 거리를 만드는 시간입니다. 이 10분마저 뭔가 잘 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2단계. 저녁 일과를 한 가지로 줄입니다

식사, 샤워, 설거지, 운동을 모두 해내려 하지 말고 오늘의 한 가지만 고릅니다. 예를 들어 ‘간단히 먹고 양치하기’ 정도를 목표로 삼고 그것만 해 봅시다. 남은 힘이 있다면 ‘산책하기’ 정도는 더해도 좋습니다, 여력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렇게 기준을 좀 낮추고 회복할 여력을 확보합시다.

3단계. 에너지가 새는 부분을 찾아서 막아봅시다

거절 못해서 쌓인 업무, 끝없이 울리는 휴대폰 알림, 점심을 거르는 습관, 지나치게 많은 목표들 과 같이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는 장면을 찾습니다. 거기서 에너지를 세이브할 수 있도록 좋은 거절의 말을 준비하거나, 업무시간 이외에는 답장을 못한다고 이야기하거나, 간단하게 준비해서 먹을 수 있도록 밀프렙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작은 조정을 시도해보세요. 저녁을 살리는 방법이 퇴근 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복의 기준을 ‘저녁을 얼마나 알차게 보냈는가’에서 ‘내일을 위해 조금 덜 소모했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세요. 즐겁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도 긴장이 좀 풀렸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형태의 자기돌봄은 남들이 좋다는 활동보다 내 상태에 맞고 반복 가능한 방식으로 찾아가야 함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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